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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6일

불안이 만든 건축물, 바벨탑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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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er of Babel, by Lucas van Valckenborch, 1594, 루브르 박물관 소장.

불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불안에 휩쌓인다. 믿음이 없어서 시작된 불안은 믿음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없앨 수 없다. 우리에게는 믿음 이외의 방법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방법으로 불안을 없애려는 죄에서 비롯된 습성이 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 없이 불안을 없애려 했던 시도였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자손들은 다시 번성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는데 시날 평지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시날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시날Shinar’의 뜻은 ‘두 개의 강 사이’로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뜻이다. 터키 동부의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한 두 개의 강이 나란히 흐르며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수메르, 아카드, 고바빌론, 신바빌론,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가 일어났다. 시날 땅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바벨탑을 만든 사람들이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창세기 11:4

 

탑을 쌓은 동기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름을 내는 것’은 단순한 유명함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삶을 의미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이어졌다. 이런 시도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흩어진 도시마다 거대한 탑이 세워졌고 탑에는 우주 혹은 신과의 연결을 의미하는 이름들이 붙어졌으며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신을 섬기는 제단이 설치되고 사제가 머물렀다. 도시는 우상을 숭배하는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신전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에 남아 있는 지구라트이다.

 

흩어짐을 면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은 흩어져야 했다.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온전하게 다스려야 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8,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창세기 9:1,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원했고 탑 자체에 종교적인 기능을 부여해 하나님을 대체하려 했으며 흩어지지 않고 탑이 보이는 주변에서만 살기를 작정했다. 불안함 때문이었다. 다시 홍수가 일어나 모두가 죽게 될까 하는 그 불안함 말이다.

 

사람들은 진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었고 역청을 이용해서 벽돌을 접착했다. 역청은 개발되지 않은 노천유전에서 구할 수 있는 천연 방수제로 모세를 담아 나일 강물에 띄운 바구니에도 칠해졌다. 탑의 하층부를 역청으로 칠하면 두 강 중 어느 쪽이 범람하더라도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역청이 칠해진 성과 높은 탑은 홍수를 피할 수 있는 대피소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 그리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주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홍수 심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두 개의 큰 강 사이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물리쳐야 했지만 스스로 역청을 칠한 탑을 쌓고 거기 머물러 살면서 혹시 모를 강의 범람에 대한 불안을 떨치려 했다.

 

성읍과 탑 건설은 성공적이었다. 온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을 흩어시기 전 까지 탑은 거침없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약속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무지개 언약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탑을 쌓고 스스로 이름을 내야 했다.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언약을 주신 분의 이름을 드러낸다. 그들은 흩어져도 멸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흩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박해를 받아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일어난 복음의 확산을 생각하기 바란다.

 

지구라트와-발굴중인-거주지-유적-1024x768

갈대아 우르에서 발굴된 주거지 유적. 저 멀리 한 층만 남은 지구라트가 보인다(전체 7층 중에 1층만 남았다). 주거지 유적에도 검은색 역청이 칠해진 흔적이 보인다.

 

 

 

*

바벨탑 사건이 창세기 10장 뒤에 있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10장 이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에는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 않고 주제별로 기록된 부분이 있다. 바벨탑 사건도 그렇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10장의 족보의 맨 마지막 사람이 살던 시대에 일어나지 않았다.

바벨탑 사건의 전제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인 것인데 이미 창세기 10장의 족보에서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흩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가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시대 범위 안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

바벨탑 이후에도 사람들은 탑 쌓기를 계속했다. 현재도 존재하는 지구라트(ziggurat)들은 진흙벽돌을 재료로 역청을 발라 건축했다. 보통 7층에서 8층으로 지어지는데 가장 높은 층에는 바빌론의 신(주로 말둑)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어떤 지구라트는 매 층마다 다른 신을 섬기도록 되어 있었다.

 

*

현재까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지구라트는 없다. 성경시대에 지어진 지구라트 중 가장 높은 것은 느부갓네살이 지은 것이다.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은 고바빌론 왕국이 남긴 에테메난키(Etemenanki)탑 유적을 고쳐 새로운 탑을 쌓았는데 높이가 90미터가 넘었다(아파트 30층 높이). 에테메난키의 뜻은 ‘하늘과 땅의 기초’다.

학자들은 느부갓네살이 새로운 탑의 기초로 사용한 고바빌론 왕국의 에테메난키 유적을 바벨탑의 흔적으로 여긴다(물론 확인할 수는 없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가장 크고 높은 탑이 에테메난키 일 뿐이다). 에테메난키 외벽 한 변의 길이는 약 400미터였고 가장 높은 곳에 바빌론의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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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일

족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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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persion of the descendants of Shem, Ham, and Japheth (map from the 1854 Historical Textbook and Atlas of Biblical Geography)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 창세기10:32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세계 지도이자 최고의 가이드 북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끝내고 광야로 나왔다. 광야는 위험한 곳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특별한 돌봄이 있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가면 되었다. 넉넉한 재산도 있었고 가축들도 있었다. 그러나 의식주와 안전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돌봄의 전부는 아니었다. 노예생활을 하느라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지식이 함께 주어졌다. 그 지식의 결정체가 창세기 10장의 족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이드북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계, 인명, 지명, 주요 도시와 그 기원을 알게 되었다. 세계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광야에서 처음 모세오경을 읽는 출애굽 백성들이 받았을 지적인 충격을 생각해보라. 노예생활을 하며 배우지 못했고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세계와 열방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처음 대하는 이스라엘을.

 

이 족보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된 민족과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기록된 인물이 세계 역사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지명이 바뀌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도 있지만 오늘날에도 분명하게 확인되는 인물과 지명들이 많이 있다.

 

야벳의 후손인 야완은 그리스의 옛 지명인 이오니아이고 함의 아들인 구스는 이디오피아, 미스라임은 이집트의 옛 명칭이다. 미스라임은 ‘두 개의 애굽’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함의 후손 중 니므롯은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1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그가 세운 도시 에렉은 고대도시 우룩의 히브리식 명칭이다. 앗수르와 니느웨는 구약 성경에 계속해서 등장하며 출토된 유물은 유럽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부스 족속은 다윗이 정복하기 전까지 예루살렘에 살던 족속이다. 가나안의 경계로 소개된 소돔과 고모라, 계속 해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했던 블레셋, 출애굽 때 이스라엘과 싸우는 아모리 족속, 메소포타미아 동쪽의 엘람, 솔로몬이 금을 가져오던 오빌 까지. 창세기 10장은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계지리 정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원, 주요 도시를 상세히 알려준다.

 

세계지리, 인명, 지명에 관한 정보는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층만이 소유하고 은밀하게 후대에 계승되는 고급정보다. 노예였을 때는 이런 정보가 주어지지도, 필요도 없었다. 묵묵히 별돌을 만들거나 전쟁에 동원되어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채 싸우다 죽으면 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애굽을 떠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손에 쥐어 주셨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족보는 출애굽 1세대들에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들, 언어에 따른 나라와 민족의 분포. 그들의 조상에 관한 내용까지 상세히 알게 되었다.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정치적 지형만이 아니었다.

넓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과 같이 조상 노아의 자손들이며 어떤 사건과 경위를 통해서 흩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 조상의 후손들이며 그 조상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했음도 알게 되었다.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출애굽 1세대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써의 세계관을 갖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족보는 재미가 없다. 족보의 인물들이 나와 관계가 있음을 깨달을 때 족보가 의미있게 보이고 감사의 이유가 되는데 창세기 10장의 족보와 우리의 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와 성경의 족보가 연결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임을 밝히는 로마서의 가르침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다. 그렇다고해서 창세기10장의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축소되지는 않는다. 노예생활을 마치고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쥐어주신 가이드북은 최고의 정보를 담고 있었다. 우리의 여정이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가이드를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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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0일

노아 4 / 술취한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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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unkennes of Noah, Giovanni Bellini(1430–1516), Musée des Beaux-Arts de Besançon, France.

홍수가 끝났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기 시작했다. 삶은 계속 되었다. 세상은 홍수로 깨끗해지고 새로워졌지만 사람들의 삶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노아는 홍수 전에 하던대로 다시 농부가 되었다. 방주에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기 전에 파종을 하고 추수를 해야했다. 노아는 포도나무도 심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벗거벗은지라 / 창세기 9:20-21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마실 음료를 확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수가 일어난 지역에서는 사방에 물이 넘치지만 정작 마실 물은 찾기 힘들다. 마실 물이 귀한 곳에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음료로 사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문제는 노아가 취해버린 것이다. 술에 취한 노아가 자신의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을 때 아들 함이 들어왔다. 아버지의 나체를 본 함은 장막 밖으로 나가 다른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부적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 창세기 9:22

 

아비의 벌거벗은 모습은 자식이 감히 보아서는 안될 것이었고 덮어 주어야 하는 허물이었다.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아버지 노아에게 아들 함이 준 것은 이해와 존중에서 비롯된 덮어줌이 아니라 수치와 불명예였다. 게다가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만 목격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수치를 공개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수치를 가려주었으며 감히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술에서 깨어 사건의 전말을 들은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는 저주를 선언한다.

이 사건으로 함의 아들 가나안은 다른 형제들의 종도 아닌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혹독한 저주를 받았고 이 저주는 실제로 성취되었다.

 

본문을 대하며 흔히 받는 질문은 가나안이 종이 된 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이냐는 것이다. 애초에 술에 취해 수치를 드러낸 노아의 잘못이 크냐, 아버지의 수치를 감추어주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까지 전달한 함의 잘못이 크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집중해야 할 것은 누구의 잘못이냐가 아니라 홍수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이 아닐까?

 

노아의 술취함까지 덮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식들의 존중을 받을만큼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노아가 술에 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노아의 술취함을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할 만한 의로움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노아가 겪었을 극심한 내적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아는 생존자다.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고 가족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모두가 죽었다. 노아가 아는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노아에게는 앞으로의 일을 논의할 어른도,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혼자 살아남았음을 즐거워하며 취했을 것 같지는 않다. 노아가 겪은 내적인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이 사건은 노아 개인의 술취함과 노아 가정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홍수 심판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세상과 사람을 다시 창조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죄를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한 세대도 지나지 못해 가정 안에서 자식이 저주를 받고 이후의 운명이 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신 직후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있었듯이,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신 노아의 때에도 범죄가 일어났다. 홍수에도 씻겨지지 않은 죄의 영향력은 당대에 즉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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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9일

노아 3 / 방주 생활, 홍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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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h’s Ark, oil on canvas painting by Edward Hicks, 1846 Philadelphia Museum of Art

방주에는 1등실이 없듯이

방주는 지중해 크루즈가 아니다.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지어진 방주 안에 암수 일곱 혹은 두 쌍씩 짐승들이 실려 있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곰들은 겨울이 아닌데도 잠을 자고 사자들이 금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요동치는 방주 안에 짐승들은 이리 저리 밀려 다니며 괴성을 질렀을 것이고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흔히 교회를 방주에 비유하는데 이런 면도 꼭 참고하기 바란다. 방주 안이 쾌적하지 않았듯이 교회 안도 그다지 쾌적하지는 않다. 당신을 불쾌하게 하고 소화 불량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곰과 사자가 잠들지 않고 식욕에 충실했듯이 그들도 나름대로 역할을 착실하게 감당했을 것이다. 당신이 싫어하는, 혹은 불편해하는 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거나 대표기도를 하고, 혹은 설교자가 되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기억해라. 살 수 있는 곳은 방주 안 밖에 없듯이, 교회 역시 그렇다는 것을. 방주 안에 1등실이 없듯이 교회도 그렇다.

 

 

홍수 이후 달라진 것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는 가인의 후손들만이 가축을 길렀다.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의 아들 아다가 처음으로 장막에 살면서 가축을 치기 시작했다. 가축들이 애완용일리는 없고 단지 털이나 젖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므로 가인의 후손들은 이미 육식을 했을 것이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 창세기 4:20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여전히 고기를 먹지 않았고 노아도 이제까지 짐승을 죽여 고기를 먹어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짐승을 죽이는 것은 그 짐승을 지으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홍수 이후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하나 있었다. 짐승을 피째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 창세기 9:4-5

 

짐승을 죽여 먹을 수는 있으되 피를 먹지 말아야 했다. 피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는 짐승을 잡아 피째 먹음으로써 짐승이 가진 힘 또는 영혼까지 소유하려는 의식이 있었고 심지어 사람을 죽여 인육과 피를 먹음으로써 그 사람의 힘과 영혼,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행위는 우상종교나 주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주의 깊에 보아야 할 부분은 피째 먹지 말라 하시며 피흘림의 대상을 짐승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범죄 이후 인간이 갖게 된 잔혹함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홍수 이후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육식이 허락되었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증거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죄로 인한 심판이 있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하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홍수로 온 지면을 씻어내고 이전 세대의 죄를 씻어낼 수는 있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 자체, 죄성은 씻어지지 않았다.

 

죄는 여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새로운 인류의 대표이자 조상으로 동일한 말씀을 들었다. 복을 주시며 이르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창세기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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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7일

노아 2 / 미련한 늙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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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모자이크. 작자 미상. 베네치아.

그러나 노아는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적 고립과 조롱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시작도 나사렛 출신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부와 권력, 인기와 온갖 유익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다는 논리가 이렇게 대중적인 동의를 얻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죄가 넘치는 사회에서 신자가 고립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부패와 포악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 결정되었다. 심판의 방법은 홍수에 의한 멸절이었고 멸절의 범위는 땅과 그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오직 한 사람, 노아만이 예외였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창세기 6:8-9

 

본문은 심판 가운데 은혜를 입은 단 한 사람을 이렇게 소개한다. 의인,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인됨이 죄 없는, 무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아 역시 패역한 세대의 사람이었다. 그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의인으로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은 사람이 원한다고 무조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미련한 늙은이

노아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 자신의 직계 가족들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짐승들까지 태울 수 있는 방주를 지어야 했다. 크기와 모양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고 노아는 묵묵히 배를 만들었다.

 

방주를 만드는 행위는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까지 하늘에서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린 일이 없었고 사람들도 경작을 해서 식량을 얻었기 때문에 배라는 물건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바닷가도 아닌 곳에서 큰 배를 만드는 행위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을 것이다(방주는 홍수가 시작된지 40일만에 물에서 떠올랐다. 물과는 거리가 먼 내륙에서 만들어졌다).

 

그래도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홍수가 일어나 땅 위의 모든 생명이 죽으리라는 말씀, 방주를 지으면 짐승들이 나아오리라는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언약을 세우시리라는 말씀까지.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짐승들이 먹을 양식까지 저축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창세기 6:22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준행했다. 부패하고 포악한 시대에 단 한 사람 노아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고 자신의 가족과 가축들이 먹을 양식도 성실하게 모았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준행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을 피할 수 없다. 비 한 방울 내려본 일이 없는 때, 뭍에서 배를 만들고 엄청나게 많은 양식을 쌓아두는 노아가 조롱을 피할 수 없었듯이 두 번 심판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오늘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미련한 늙은이가 만든 방주가 홍수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방주이듯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진 미련함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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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3일

노아 1 /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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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도들이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방주로 돌아왔을 때를 그렸다. 카타콤 벽화.

홍수 직전의 세상

왜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던 세상을 심판하셨을까? 그 중에서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사람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을까? 홍수 심판을 결정하시기 직전 하나님의 마음은 이러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창세기 6:6

 

세상은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했고 계획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는 부패와 포악함이었다. 사람이 쏟아 놓는 부패와 포악함이 세상에 가득했다. 생육과 번성하여 인구가 늘어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했지만 그 반대였다. 이미 생육과 번성은 올바른 결혼관계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성적타락으로 죄가 확산되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 창세기 6:1-2

 

이제까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서로 혼인하지 않았었다. 이 구절에서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냐는 것인데 일단 더 중요한 문제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라멕이 시작한 일부다처제도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아내로 삼게 되는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 눈으로 보고, 마음에 좋아지면 그대로 아내로 삼았다는 것인데 선악과를 먹을 때의 본즉’, ‘보암직하고’, ‘먹은지라와 같은 패턴이다.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 선택하는 패턴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론이 있다. (1) 천사들이라는 견해다. 그러나 천사는 육이 없고 천사와 인간이 혼인을 한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다. (2) 고대의 유력한 지도자들, 왕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고대 그리스까지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신이라 칭하거나 신의 아들이라 선언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출애굽 전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파라오를 계속 만났던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기록하면서 그런 의미와 뉘앙스를 가지고 본문을 기록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3) 셋의 후손들이라는 견해다. 셋의 아들 에노스 때에부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웠고 하나님을 떠나 살던 가인의 후손들이 낳은 딸들을 사람의 딸들로 보는 견해다.

 

나는 세 번째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셋의 계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았고 가인의 후손들과 혼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가인 계보에서 태어난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혼인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죄에 동화되어 갔고 그로 말미암아 더 깊고 위험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넉넉치 못한 식량으로 연명하던 셋의 후손들에게 어려서부터 고기를 먹으며 자란 여인들을 목격하는 것은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당연히 건강했고 그들 중에는 용사도, 고대에 명성 있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견해가 더 타당한가를 떠나서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했던 마음에 내면화된, 구조화된 죄의 패턴이다. 아담과 하와 이후 많은 세대가 흘렀지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한 사람은 에녹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가인의 후손들은 풍요로웠지만 더 깊이 타락했고 그나마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던 셋의 자손들도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기 때문에 말씀 대신 죄를 택했듯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러한 죄의 패턴은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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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일

에녹과 므두셀라,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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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from the 1728 Figures de la Bible; illustrated by Gerard Hoet (1648–1733)

아담에서 노아까지 :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창세기 5장에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이후로부터 홍수 심판이 일어나는 노아까지 아담의 자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계보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만 기록되었다.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그들이 아무리 위대한 성을 쌓고 목축, 악기, 농기구와 무기를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한 사람일지라도 기록되지 못했다.

 

아담의 계보는 노아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단숨에 달려간다. 기록된 내용도 단순하다. <자녀를 낳고>, <살고>, <죽었더라>. 이것이 계보에 기록된 내용의 전부다.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았고 그 후로 몇 년을 살다가 죽었는지만 기록되어 있다. 이 흐름에서 에녹은 예외적이다.

 

에녹,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빠른 속도로 출생과 죽음을 언급하며 다음 세대를 기록하던 족보의 속도가 에녹에서 잠시 멈추고 그의 삶을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에녹은 동생을 죽인 가인의 아들이 아니다. 죽은 아벨 이후 태어난 셋(Seth)의 후손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창세기 5:2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했어도 아직 까지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없었다. 에녹이 처음이었다. 범죄와 타락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출현한 것이다. 에녹도 <자녀를 낳고> <살았더라>고 기록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 에녹 이외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엘리야 뿐이다.

 

이 땅에서 보여진 에녹의 마지막은 특별한 것이었지만 그의 삶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다른 부모세대처럼 그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았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다. 성을 쌓지도 않았고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를 만들어 이전과 이후가 선명하게 구별되는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런 업적과 문화는 가인의 후손들이 더 훌륭하게 남겼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과의 동행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면모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흔히 강함, 부유함, 리더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에녹의 삶이 보여주는 결과물은 그런 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얻은 것은 손에 쥘 수 있는 종류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는 부유하지도 리더가 되지도 않았다. 하나님과의 동행 자체가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상급이었다. 에녹이 받은 상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주어졌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장수한 사람이다(구백육십구 세에 죽었다). 아버지가 하나님과 동행하니 아들이 장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므두셀라의 장수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계보의 기록대로 수명들을 문자적으로 계산하면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가 시작된다. 조금 더 드라마틱 하게 말하자면, 므두셀라의 숨이 끊어졌을 때, 아직 까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던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홍수의 시작이었다. 에녹을 데려가시면서 홀로 남겨진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그의 아들이 죽기 전에는 홍수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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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31일

가인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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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cut for “Die Bibel in Bildern”,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860. 가인이 성을 쌓는 모습을 표사한 판화 작품.

형벌과 두려움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벨이 흘린 피가 땅에 흘려졌고 그로인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범죄 이후 가인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농부였던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이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창세기 4:12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과 땅에 피하여 유리하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여기에 두려움이 더해졌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은 죄가 가져온 열매 중 하나였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두려움이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창세기 4:14

 

두려움은 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인은 살인자였다. 가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가인을 죽이고자 마음 먹게 되는 것 역시 두려움 때문이었다(죄와 두려움은 언제나 함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면 가인이 받은 벌의 칠곱 배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누가 봐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표를 가인에게 주셨다. 그래서 가인은 죽임을 면할 수 있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 창세기 4:16-17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다. 그리고 성을 쌓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했지만 놋 땅에 거주하며 자식을 낳고 성을 쌓았다. 더 이상 유리하지 않고 그곳에 들어가 정착하겠다는 뜻이다. 놋의 뜻은 유리하다였지만 가인은 더 이상 유리하기를 거부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난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성의 이름은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불렀다. 자신은 유리하는 자가 되었으나 아들 에녹은 성을 소유한 정착민으로 살게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리하는형벌을 자기 당대에 끝내고자 했다. 여호와 앞을 떠났고 여호와께서 주신 형벌도 스스로 종료시켰다.

 

가인의 자손들은 에녹성을 중심으로 번성했고 다섯 세대가 지나 라멕이 태어난다. 라멕은 처음으로 두 아내를 맞이하여 일부다처를 시작한 인물이 되었고 자신에게 상처나 상함을 입히면 나이 어린 소년이라도 죽여 버렸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 창세기 4:23-24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면 칠 배의 벌이 주어진다는 선언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라멕은 자신을 죽이면 칠십칠 배의 벌이 주어질 것이라 스스로 선언한다.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의 후손은 스스로 여호와를 대신하여 형벌을 선언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멕의 세 아들은 가축을 치고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연주하며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무기)를 만드는 자들이 되었다. 가인이 쌓은 성에서 가인의 자손들은 더 많이 생산하고 즐기며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부유했다. 안전한 성에서 거주했고 강력한 무기도 있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형벌인 유리하는 삶은 가인이 성을 쌓고 거주함으로써 끝내 버렸다. 그들은 점점 부유하고 세련된 삶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점점 더 잔혹한 사람들이 되어갔다. 여호와 앞을 떠나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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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30일

가인과 아벨, 그와 그의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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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n slaying Abel, Peter Paul Rubens(1577-1640),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그와 그의 제물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을 길렀다. 이마에 땀을 흘려 경작을 해야 하고 짐승을 길러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두 아들은 아담과 하와에게 적지 않은 소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아담과 하와에 의해서 이미 드려지고 있었을 것이고 두 아들은 부모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불거져 나왔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이다. 가인은 화가 났다. 분했다. 하나님 앞에서도 안색이 변하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 창세기 4:4-5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제물만이 아니라, 제물이 먼저도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먼저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인은 곡식을 드렸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 때문에, 아벨이 더 귀한 것을 드렸고 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아벨의 손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훗날 주어지는 율법에서도 짐승과 곡식 모두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고, 예수님께서도 예물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셨음을 기억하자. 문제는 사람이었다. 아벨은 받으시고 가인은 받지 않으신 것이었다. 드려지는 제물의 종류나 가치의 경중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 것이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창세기 4:7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경고하셨다. 사나운 짐승이 먹이를 노리고 엎드려 도사리듯이 죄가 가인을 노리고 엎드려 있다고 말씀하셨다. 강력한 의지로써 분노를 버리고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다시 낯을 들고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이 경고를 따르지 않았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 창세기 4:8

 

The First Mourning (Adam and Eve mourn the death of Abel); oil on canvas 1888 painting by William-Adolphe Bouguereau

첫 번째 죽음은 이렇게 일어났다. 부주의한 실족이나 사나운 들짐승에 의한 것이 아닌 사람에 의해서, 그것도 형제에 의해서 일어난 살인이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선악과를 먹은 순간 즉각적인 육체의 죽음으로 오지는 않았지만 가족 안에서, 형제 사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살인으로 눈 앞에 보여졌다.

 

아벨이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며 대답했고 가인은 아버지 아담에 이어 두 번째로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 범죄함으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밭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창세기 4:12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났듯이 가인도 이제까지 경작하던 땅을 떠나야 했다. 떠나는 가인은 형제를 죽인 자신 또한 다른 형제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이런 가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 창세기 4:15

 

가인에게 주신 ‘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인 자신도, 그를 보는 사람도 ‘죽여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중심의 차이가 드러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자리에서였다. 이전까지는 가인은 가인대로, 아벨은 아벨 대로 각자 생업을 가지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형제들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어떤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나게 되었다. 제사가 아니었다면 가인의 중심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이유다. 나도 몰랐던 죄, 알면서도 외면했던 죄, 여전히 나를 집어 삼키려 도사리고 있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다. 죄가 발각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니 본래 무죄했던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하나님 앞에 죄가 발각되는 것은 은혜다. 이미 속죄의 길도 열어두셨고 죄값도 치루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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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9일

아담과 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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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 카타콤(the Catacombs of Marcellinus and Peter)에서 발견된 초기 기독교 벽화.

이제는 불가능한 일

범죄 이전 아담과 하와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은 많지 않다. 에덴 동산은 동방 어딘가에 있었고 그곳에서 땀 흘리지 않고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자손을 낳지는 않았지만 출산의 고통이 없었다는 것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담이 가진 지혜와 통찰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서 각종 생물들을 아담 앞으로 이끌어 오셨고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고자 하셨다. 아담은 각 생물을 불렀고 아담이 부른 대로 그 생물의 이름이 지어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 창세기 2:19

 

이 외에 우리가 범죄 이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타락 이전에 아담이 소유했던 지혜와 영광, 힘과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부요와 탁월함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그때를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지점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타락 이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상상에 불과하며 그때의 실제를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로 오염되고 일그러진 우리의 이성으로는 그때를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복원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타락한 인생이 아무리 고결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고 영속성과 가치가 함의된 용어를 동원해도, 타락 이전의 상태는 우리의 이성이 닿을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물론 이것도 죄의 결과 중 하나다.

 

눈금 지우기

범죄와 타락으로 인간은 선악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추한지 결정하는 기준이 있다.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시선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악한지 측정하는 눈금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의 취향, 선호도, 가치관, 세계관을 따라서 입맛에 따라 옳고 그름을 나누고 판단한다.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창세기 3:5

 

범죄하고 타락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녀의 지위를 회복하게 될 때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눈금을 지우는 일이다. 내 눈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금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눈금이 지워지지 않고 더 정교해지는 경우가 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눈금 위에 하나님의 눈금을 더한 것이다. 이런 경우 측정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로 타인이 된다. 그래서 타인에게 더 엄격하고 잔혹하다. 이런 사람들이 측정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삼는 날은 쉽게 오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말들

하와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말’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말들에 귀를 기울일 때 문제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말들에 귀를 기울일 때,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에 관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 본질에서 멀어지고 초점을 잃게 되며 그릇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뱀의 말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뱀이 제시한 주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더 귀를 기울여 듣게 된다.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에 관한, 성경에 관한, 교회에 관한 갖가지 말과 이론이 있다. 그것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하자. 하나님에 관한 이론들은 날이 갈수록 세련되고 정교하며 들음직하고 신뢰할만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