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글 목록: 출애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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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0일

하나님의 시험, 불이익이 없는 시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작정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믿을 수 있는 이유, 신뢰할 만한 근거를 끊임 없이 제공하시면서 믿음의 궤도에 오르기를 기다리셨다.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강압이나 상황에 눌려서,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우러나올 순간을 기다리신다. 그래서 성급하게 몰아가지 않으신다. 어찌 그리 믿음이 없냐고 책망도 하시고 노하실 만한 상황이지만 그러지 않으신다. 책망 보다는 끊임 없이 기회를 주시고 믿음을 드러낼 순간을 만드신다. 그것이 시험이었다.

Figures_The_Israelites_Gather_Manna_in_the_Wilderness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이스라엘 백성들. illustrators of the 1728 Figures de la Bible, Gerard Hoet (1648–1733) and others, published by P. de Hondt in The Hague in 1728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면 벌을 받거나 불이익이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만나를 거두러 나간 안식일 아침에도 ‘어찌하여’라고 탄식은 하셨어도 그 때문에 물이 다시 써지거나 만나가 더 이상 내리지 않거나 메추라기 떼가 날아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때 마침 일어난 아말렉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홍해를 건넌 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과 의식이 있는,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믿음을 가질 기회였다.

 

마시는 문제 : 그들을 시험하실새

광야 길을 걸어 3일 만에 도착한 곳은 ‘마라’였다. 물이 있었지만 사람이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물 맛을 따질 때는 아니었지만 마시면 탈이 나는 물이었다(철분이나 칼슘, 염류가 많이 포함된 물은 식수로는 사용하지 못한다. 빨래를 하거나 생활용수로만 쓰던 우물이 우리 나라에도 흔히 있었다). 사흘 전 까지 찬송을 부르던 입에서는 원망의 말이 나왔고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나무를 물에 던지자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 출애굽기 15:25

 

단지 마실 물이 생긴 사건이 아니었다. 법도와 율례가 정해졌고 준수하는지 시험하셨다. 마라의 쓴 물은 단지 물 문제를 해결해 주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가 결부된 사건이다.

 

먹는 문제 : 내가 시험하리라

유월절 밤에 마련한 음식이 바닥나자 온 회중이 원망하기 시작했다. 물은 오아시스에서 구한다고 해도 식량이 문제였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 생각도 나고 떡고 먹고 싶었다. 나오지 말 것을, 배부를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이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만나와 메추라기였다. 여기서도 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시험이 함께 있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proved them) / 출애굽기 16:4

 

시험의 내용은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안식일 전 날에 평일의 두 배의 만나가 공급되었고 충분한 식량이 있으니 안식일에는 나오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 출애굽기 16:26-28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동했고 캠프를 세웠다. 오아시스가 흔하지 않은 광야라고는 하지만 유독 물이 없는 장소로 인도하심을 받았다. 하필이면. 백성들은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고 모세는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아침 마다 만나를 거두어 먹고 메추라기를 잡아 먹으면서도 물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다. 마라에서도 물을 마셨지만 그래도 물이 있기는 했다. 지금 이곳은 아예 물이 없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 출애굽기 17:6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옴으로써 소요가 그쳤다. 출애굽기는 이 사건을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했다고 정의한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 출애굽기 17:7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출애굽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은 알지만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이번에도 우리는 물을 마실 수 있을까? 이 광야길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갈 수 있겠는가? 만나는 계속 내릴 것인가? 메추라기는 계속 날아들 것인가?

 

광야에서는 생존을 염려해야 한다. 우물 하나를 두고 생사를 걸고 싸운다. 대추야자 나무 몇 그루의 소유권을 놓고 부족끼리 살육을 벌인다.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벌거벗은 갓난 아이와 다름 없다. 한번도 광야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이다. 이스라엘의 염려는 나름대로 이유가 충분하다.

 

이스라엘 관점에서 보면 원망이 최고다. 원망하면 뭐든 생겼다. 마실 물도 생기고 양식과 고기도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셨지만 원망이 듣기 싫다거나 견딜 수 없어서 채워주신 것이 아니었다. 단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물을 주실 때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실 때도 말씀을 준행하는지 시험하신다.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르기 까지. 이렇게 광야 길을 가고 있다. 이스라엘에게는 먹고 마시는 일이 최고로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이 믿음을 갖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다. 그래서 시험하신다.

 

하나님의 시험은 정당하며 이스라엘에게 유익이었다. 만약 시험이 없었다면, 시험 없이 물도 마시고, 만나도 먹고 고기도 먹었다면 이스라엘이 믿음을 갖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원망하면 주는 신이 될 뿐이다. 예수님도 무리들에게 같은 마음을 갖고 계셨다.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의 해결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질 때 시험이 함께 있다. 먹고 마시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믿음을 보기 원하실 때, 그때야 말로 신앙이 표현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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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5일

turn back, 그럴 필요가 있었다

이적에는 목적이 있다. 일상적이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은, 실현 불가능한 일을 행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적의 목적은 믿음이다. 이적은 보고, 경험하고 믿으라고 일어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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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raoh’s army engulfed by the Red Sea, oil on canvas, by Frederick Arthur Bridgman. Frederick Arthur Bridgman (1847–1928).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믿음이 없었다. 열 개의 재앙을 목격했고 말씀대로 애굽을 떠나왔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 대한 신뢰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도 이들의 연약함을 아셨다. 전쟁을 만나면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가게 하셨다. 가까운 길을 두고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바닷가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turn back)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 출애굽기 14:1-2

 

 

바닷가는 방향을 돌이켜(turn back) 가면서 까지 찾아갈 자리가 아니었다. 싸움에 패할 경우 도망칠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군을 몰아 넣어야 하는 죽을 자리가 바닷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일부러 바닷가에 서게 하셨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뒤쫓아온 애굽 군대를 맞이하게 된다. 맞서 싸울 힘도, 도망갈 길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벼랑 끝에 서게 하셨고 거기서 그들이 가진 믿음의 실체와 한계가 드러났다. 위기 가운데 부르짖었지만 믿음이 아닌 두려움 때문이었고 모세를 향해서는 원망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앞으로도 계속 될 원망이었다). 그들은 출애굽 자체를 후회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 출애굽기 14:12

 

홍해를 건넌 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앞에는 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는 상황.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기 있으라고 하신 상황.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전쟁을 만나면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되었던 이 무리들을 일부러 바닷가에 머물게 하시고 애굽 군대를 만나게 하셨다. 바다도 갈라지게 하실 수 있다고 자랑하시려고?

 

이제 백성들이 믿어야 했다. 애굽에 묻을 땅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죽게 만드냐는 무리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했다. 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신뢰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turn back하게 하셔서 바닷가에 머물게 하신 이유, 애굽 군대를 마주하게 하신 이유, 홍해 물을 말리시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어 마른 땅을 건너게 하신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 출애굽기 14:31

Turn back. 앞으로만 나아간다고 최선이 아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으실 때가 있다. 잘 가던 길을 돌이켜 빠져나갈 구석 하나 없는 곳으로 몰아가실 때가 있다.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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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7일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게 하실 때

최적의 경로가 뻔히 보이는데 더 멀고 험한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어차피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니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것은 우리 수준의 생각이다. 먼 길로 돌아갈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 좋자고 그러시는게 아니다.

출애굽의 목적지는 가나안이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네게브 사막을 지나면 된다. 야곱도 이 길로 애굽에 내려왔고 기근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던 아브라함도 이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 출애굽기 13:18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은 홍해의 광야 길이었다. 이 길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가나안으로 가는 ‘상식적인 길’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지도로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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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egyptian_empire_and_the_hittites <출처 : BIBLE ATLAS, Zaine Ridiling, Access Foundation>

 

위 사진은 애굽이 헷(히타이트) 족속과 전쟁을 하며 이동했던 경로를 보여준다(두 나라는 오래 전 부터 전쟁을 해 왔고 그때 마다 자기네 사는 땅에서 나와 가나안 어디쯤에서 만나 싸웠다).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방향은 북쪽 지중해 연안이 아닌 남쪽, 홍해 방향이었다. 이유는 ‘겁을 먹고 돌아가려고 할까봐’였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 출애굽기 13:17

가나안으로 가는 최단 경로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바다를 기반으로 사는 사람들이었고 툭하면 전쟁터가 되는 땅에서 사는 거친 사람들이었다. 남자만 60만 명이 넘는 무리를 자기네 집 안방으로 지나가게 놓아둘리가 없다. 안그래도 애굽과 헷 사이에 끼어서 군대가 지나갈 때 마다 적지 않게 피해를 보았던 전력이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였다. 이들은 노예였다. 복종에 길들여졌고 싸움을 배우지도 못했다.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하나님의 염려는 합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애굽을 나왔으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건 노예로 살아보지 않은 우리 생각이고,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은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애굽 노예로 지내는 동안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 필요도 없었고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에 길들여진 것이다. 애굽 통치자들은 노예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들의 연약함을 아셨고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때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비상식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 머리 속의 네비게이션은 최단거리를 추천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더 멀고, 더 험하다.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적의 경로를 만드신다. 더디 가는 것 같고, 쓸데없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 같아도 그게 그렇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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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2일

유월절,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고 있다. James J. Tissot, “The Signs on the Door” (1896-1900), watercolor, Jewish Museum, New York.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달력이 주어졌다. 애굽 달력으로 몇 월인지 상관 없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지금부터 1월이다. 새로운 달력에서 처음으로 지켜야 하는 절기는 유월절이었고 자손 대대로 기념해야 했다. 새로운 삶의 지표가 주어지고 기념할 절기가 주어진 이유는 새로운 삶을 계속해서 새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지나간 과거로 돌이키지 않기 위해서다. 새로운 삶을 계속 새롭게 유지하려면 기념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출애굽기 12:2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 달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달력, 하나님의 일정표 대로 살게 되었다. 노예들에게 주인의 달력은 노동 일정표다. 강의 범람, 파종, 추수, 각종 건축사업이 빽빽하게 기록된 일정들은 노예가 감당해야 할 노동의 목록이었다. 그런 애굽 달력을 버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새 해, 새 달이 되었다. 이제는 애굽의 일정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정표 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애굽 절기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절기를 지킨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 출애굽기 12:14

 

기념해야 할 이 날은 유월절이다. 열 번째 재앙, 곧 장자들의 죽음이 일어난 날이 유월절이다. 유월절(逾越節)의 뜻은 ‘넘어간다’이다. 애굽 전역에 임한 장자의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은 당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의미이다.

 

유월절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제 1월이 된 이번 달 10일에 흠 없는 어린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되 모든 가족이 먹을 수 있는 만큼 준비한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누구도 예외가 없어야 했다. 준비한 짐승은 14일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해가 질 때 잡아 고기는 불에 구워 먹고 남은 것은 불사른다. 양이나 염소의 피는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었다가 출입문의 두 기둥을 비롯해 윗부분까지 골고루 바른다.

 

음식도 평소와 다르게 준비한다. 보통은 반죽에 누룩을 넣어 발효 시킨 후에 구워 먹었겠지만 이 날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굽는다(누룩 없는 빵을 무교병이라 부른다). 모든 음식은 밤중에 먹었는데 옷을 모두 차려 입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Tissot_Passover

The Jews’ Passover (watercolor circa 1896–1902 by James Tissot).

 

그 밤에 열 번째 재앙이 닥쳤다.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짐승의 피를 출입문에 선명하게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에만 장자의 죽음을 면했다. 죽음은 출입문에 발라진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다. 그래서 페사흐, 유월절이다. 짐승을 잡고 피를 바르지 않은 모든 애굽 가정에 장자들의 죽음이 있었다. 바로의 왕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내쫓기에 이른다.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 출애굽기 12:26

 

유월절은 자손대대로 기념해야 했다. 매 년 첫 달이 되면 10일에 짐승을 고르고 14일에 잡아 누룩 없는 빵과 함께 먹음으로써 유월절을 지켰다. 평소와 다른 누룩 없는 빵을 먹고 밤 늦은 시간에 외출을 할 것도 아닌데 옷을 차려 입고 지팡이까지 붙잡고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지 아이들이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때 부모는 출애굽의 전 과정을, 어떻게 자신들이 노예 생활을 마치고 애굽을 나올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 해야 했다. 현재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는데 자녀들 중 한 명이 ‘왜 이렇게 먹나요?’라고 질문을 하는 전통이 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유월절 양의 죽음이 있는 집에 생명이 보존되었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의 삯인 사망 대신 생명이 주어졌다. 유월절 이후 노예 생활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듯이 예수님 이후에 죄에 종노릇 하던 삶이 끝나고 자유자가 되어 영생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을 대대로 기념하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을 기념한다. 우리의 새 삶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는 일. 그것이 바로 예배가 갖는 의미 중 하나이고 우리가 지키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통해 계속 기억해야 할 의미이다. 새로운 삶을 계속 새롭게 유지하려면 기념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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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8일

말씀대로 쫓겨나다

Death of the Pharaoh's firstborn

열 번째 재앙은 바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죽은 장자를 안고 있는 바로와 왕비의 모습을 그렸다. Death of the Pharaoh’s firstborn *oil on canvas *77 x 124.5 cm *signed: L. Alma Tadema *1872

그 날이 왔다. 430년 간의 애굽 생활을 마치고 애굽을 떠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할 날이 왔다. 열 번째 재앙을 당하자 바로도 마음을 바꾸었다.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쫓아내기로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말 그대로 쫓겨났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바로는 애굽 최고의 자원인 노예를 풀어주지 않기 위해 지난 재앙들을 버텨냈다. 신하들은 나라가 이미 망했다고 하소연했지만 망한 나라를 재건하려면 노동력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망해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도 노예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지막 재앙은 버텨낼 수 없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고, 바로 본인의 아들도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 출애굽기 12:39

 

애굽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서 떠나라 재촉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길에서 먹을 양식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붙잡더니 우리를 쫓아내는구나,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할지 모르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이스라엘을 쫓아낼 것이라고 처음부터 말씀하셨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의 첫 대면을 마치고 나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벽돌은 같은 수를 만들어야 했지만 재료를 직접 구해야 했다. 더 힘들어진 삶을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쫓아내리라고 말씀하셨다.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Pearce_Lamentation

장자의 죽음에 관한 또 다른 그림. 이미 입관 절차를 마친 모습이다. Lamentations over the Death of the Firstborn of Egypt (1877 painting by Charles Sprague Pearce)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 출애굽기 6:1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이 또 있었다. 애굽에서 빈 손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애굽인들에게 금과 은, 각종 패물은 물론이고 의복까지 구해서 자녀들을 꾸며서 출애굽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 출애굽기 3:21-22

 

애굽에서 쫓겨난다는 말씀도, 금은보화에 의복까지 구해서 나간다는 말씀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말씀이었다. 우리를 풀어줄까? 금은보화를, 패물을, 옷을 가져다 입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된다. 그래 보였다. 그러나(항상 그랬듯이) 우리는 안 된다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모세도 그랬다.

눈 앞의 현실이 참담하고 미래가 암울해 보여도,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현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변수로 인정하자. 계획을 세울 때는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을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당신의 계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끼워 넣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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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4일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것

A map of Canaan, by Philip Lea

A map of Canaan, by Philip Lea. 1692년. 구약성경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가나안 지도. 가나안 지역을 강조하다 보니 전체적인 축적이 맞지 않는다. 가나안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매우 작게 그려졌다. 출처 : 위키미디어

너희는 … 알리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이것이 거듭되는 재앙의 목적이었다. 계속된 재앙으로 애굽 우상들의 헛됨이 드러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을 통해 누가 참된 신인지,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애굽에서 태어나 노예로 자란 세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오래 전에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져 내려오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기를 원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 출애굽기 10:1-2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셨다. 재앙이 일어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보호하신 것이다.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들끓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재앙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었다. 개구리가 올라올 것을 경고하는 말씀을 잘 살펴보면 재앙을 당할 당사자가 분명하게 지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앙은 이스라엘을 비껴서 오직 바로에게 속한 이들에게만 임했다.

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 출애굽기 8:3-4

개구리에 의한 괴롭힘을 당할 대상은 ‘네 궁, 네 침상, 네 신하의 집, 네 백성, 네 화덕, 네 떡 반죽 그릇’이었다. 재앙의 당사자들은 바로에게 속한 자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재앙에서 벗어나 있었다. 피해가 크고 치명적인 재앙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의 구별하심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다음의 세 구절은 파리, 가축전염병, 흑암 재앙이 이스라엘에게는 임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 출애굽기 8:22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 출애굽기 9:4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 출애굽기 10:23

파리도, 전염병도, 흑암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만 닥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우연일 수가 없었다. 처음 재앙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럴듯 하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나일 강물이 피로 변했을 때 요술사들은 물이 피가 되게 했고(적어도 그렇게 보이게 했다) 강물에서 개구리가 뛰쳐나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바로도 안심하고 초기의 재앙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우리 애들도 할 수 있는거잖아?). 그러나 이후에 일어난 국가적 재난이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지역에만 일어나지 않는 것은 재연할 수 없었다.

파리가 들끓은 것도 그럴 수 있다 치자. 수 많은 개구리가 죽어 거리마다 산더미 같이 쌓여 있으니 당연히 파리가 들끓게 마련 아닌가? 파리가 들끓었으니 전염병이 생기고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디 먼 동네에서 화산이라도 터지면 화산재가 날려와 몇 일 동안 해를 볼 수 없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고센 땅에는 파리 한 마리 날지 않았고 가축 한 마리 폐사하지 않았으며 온 애굽이 암흑에 덮여도 빛이 있었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섞인 우박이 내릴 때에도 고센 땅은 안전했다. 이런 일은 누군가에 의해 고안되지 않은, 살아 있는, 능력 있는, 진짜 신만이 할 수 있는, 오직 여호와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초태생의 죽음이 예고 될 때에도 이스라엘은 보호를 받았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 출애굽기 11:6-7

특별한 보호의 목적

애굽에 임한 재앙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이 특별한 보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다. 여호와,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430년을 머물렀다. 최근 몇 세대는 노예로 살았다. 계속되는 낙심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희미해지고 노예로써의 습성이 깃들었다. 지배민족의 우상숭배가 더 합리적으로 보였고 눈에 보이는 만들어진 형상을 신으로 믿기에 이르렀다.

애굽을 떠나기 전에 누가 참된 신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애굽에서 인도해 낸 분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헛된 우상에게 영광을 돌릴 수도 있었다(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출애굽의 역사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났으며 그 분이 자신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십계명의 첫 계명의 ‘들어가는 말’에 해당하는 출애굽기 20:2절에서도 확인된다. 20:2절과 십계명의 첫 째 계명을 단 숨에 읽어보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출애굽기 20:2-3

하나님께서는 누구에 의해서 종 되었던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기 원하신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반응으로 하나님만을 믿으라 요구하신다. 재앙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그러나 이 간단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존중 받는 때는 별로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우리를 특별히 보호하고 계시지만 정작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일은 드물다.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는 말씀이 잠언에도 있는 이유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6

 

a4qt

2015년 12월 23일

재앙과 우상들, 우리의 우상들

애굽에 임한 열 개의 재앙과 애굽 우상들을 한 번 더 정리한다. 각각의 재앙은 타겟(?)이 되는 우상이 있었다. 단지 더 강하게, 더 무섭게 하려는 재앙이 아니라 애굽이 섬기는 우상들이 얼마나 헛되고 쓸모 없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재앙의 당사자가 된 애굽 백성과 목격자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애굽에 일어난 재앙은 애굽 신들의 배신, 혹은 애굽 신들의 죽음이었고 이제까지 노예들의 신에 불과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이 확인된 사건들이었다.

강 물이 피로 변하고 식수를 구할 수 없게 되고 개구리가 뛰쳐나오고 파리와 이가 들끓었다. 역병이 일어났고 문자 그대로 천재지변이 일어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재앙은 자연재해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내려진 준엄한 심판이었다. 재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애굽의 우상숭배를 알아야 한다. 각각의 재앙은 애굽의 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1. 나일강이 피로 변하다 : 크눔과 하피

크눔(khnoum)은 나일강의 수호신으로 숫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나일 강의 수량을 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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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눔(khnum). 나일 강을 관장하는 신으로 숫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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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hapi)는 나일 강의 범람을 관장하는 신이다.

나일강은 애굽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나일 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의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가 애굽이다. 나일 강은 매년 같은 시기 범람하는데 그 때 마다 상류의 비옥한 흙이 떠내려와 해마다 새로운 토지가 형성된다. 안식년도 필요 없이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나일 강의 수호신은 크눔, 범람을 관장하는 신은 하피였다. 나일 강물이 피가 되었으니 그 해의 농사는 망친 것이고 당장 마실 물도 없게 되었다.

2. 개구리 : 헤케트

헤케트(heqet)는 개구리 형상의 여신으로 출생을 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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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케트(heqet). 개구리 머리를 한 신으로 출생을 관장한다.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헤케트.

 

3. 이 : 게브

게브(geb)는 대지의 신이다. 대지는 곡물을 생산했으나 대지의 티끌이 이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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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누트(nut), 그리고 그 사이에 바람과 공기의 신 슈(shu)가 있다.

 

4. 파리 : 케페르

파리, 혹은 딱정벌레, 쇠똥구리
케페르(kheper)는 풍뎅이 머리를 하고 있다. 태양신의 여러 이름 중 하나로 태양신은 아침에는 케페리, 낮에는 라, 저녁에는 아툼으로 불렀다. 쇠똥구리가 굴리는 동그란 배설물 덩어리가 태양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쇠똥구리, 딱정벌레를 비롯한 벌레 종류도 신을 상징하는 곤충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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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페르(kheper). 머리가 딱정벌레이다. 애굽의 태양신은 아침에는 케프리, 낮에는 라, 저녁에는 아툼으로 불리운다.

 

5. 가축들의 죽음 : 하토르

하토르(hathor)는 하늘의 여신으로 소 머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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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르(hathor). 하늘의 여신으로 머리가 소의 형상이다.

 

6. 독종 : 이모텝과 이시스

치료의 신 이모텝과 보호의 여신 이시스는 독종을 치료하지 못했다.
이모텝(imhotep)은 고대 이집트 제3왕조의 파라오 Djoser(조세르, 2650–2600 BC)의 재상이었다. 학자, 건축가, 의사로 최초로 계단식 피라미드를 설계한 인물이다. 출애굽 시대에는 신격화되어 건축, 공학, 의술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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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텝(imhoterp). 본래 3왕조 Djoser(조세르, 2650–2600 BC) 시대의 재상이었으나 후대에 신격화 되었다. 건축과 의술의 신. 루브르 박물관.

 

이시스(isis)는 보호의 여신으로 모성과 마술, 생산의 신이다. 머리에 옥좌를 이고 다니는데 바로의 권력은 이시스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믿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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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스(isis).보호, 모성, 마술, 생산의 신. 머리에 바로의 보좌를 얹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7. 우박 : 누트

누트(nut) : 하늘의 여신. 하늘의 여신은 더 이상 좋은 날씨를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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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누트(nut).

 

8. 메뚜기 : 오시리스와 세네헴

오시리스(osiris)는 사후세계의 신이자 풍요의 신이었다. 오시리스는 메뚜기 재앙으로부터 애굽의 풍요를 지켜내지 못했고 메뚜리 머리를 가진 세네헴(senehem)은 재앙으로 나타났다.

La tombe de Horemheb (KV.57) (Vallée des Rois / Thèbes ouest)

오시리스(osiris)는 사후세계의 신이자 풍요의 신이었다. 가장 왼쪽이 오시리스. 얼굴과 손의 피부색이 시체와 같이 묘사된 것은 사후세계의 신이기 때문이다.

 

9. 어둠 : 아문-라

– 아문-라 : 태양의 신
‘아문-라’는 태양의 신이자 애굽 신의 우두머리가 된다. 언제나 애굽을 비추던 태양의 신은 어둠에 갇혀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문(amun)은 나일 하류에서 숭배하던 바람과 공기의 신이고 라(ra)는 낮, 정오의 태양을 의미하는 신이었다. 애굽에서는 왕조의 필요에 따라 두 신을 합하여 하나의 신을 만들기도 했다. 아문-라는 나일 강 상류와 하류의 두 신을 합쳐 놓은 통일왕조의 신이었다. 라(ra) 숭배는 황소 숭배와도 연관이 있다. 소의 눈을 ‘라의 눈’으로 부르며 소를 숭배하기도 했는데 황소 우상 아피스(apis) 숭배로 이어진다. 훗날 시내 광야에서 만들어진 금송아지는 아피스 숭배에 노출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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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라. 나일 강 상류와 하류의 두 신 아문과 라를 통합하여 아문-라가 고안되었다. 태양신이다.

 

10. 장자의 죽음 : 호루스

장자의 죽음에서 바로의 장자가 죽임을 당한 것은 호루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호루스(horus)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로 바로의 수호신이자 왕가의 보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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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스(horus).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로 바로의 수호신이다.

 

 

애굽의 신들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고 애굽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용도에 맞는 우상을 숭배했다. 이러한 모습은 다신교 체제를 가진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애굽 뿐만 아니라 가나안, 그리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상숭배는 욕망 그 자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분야의 신을 찾아 신이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우상숭배다. 우상이 요구하는 조건 자체가 숭배자의 욕망을 채워주는 경우도 있다(주로 음행으로). 그래서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애굽의 우상들이 재앙으로 무력하게 되는 것이 통쾌한가?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우리의 탐심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사례는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우상들이 하나 하나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는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우상 처럼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신앙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으로 포장된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하나님과 관계가 있을까.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탐욕의 결과물을 신실함의 대가로 받은 축복으로 여긴다. 자신들의 탐심을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고자 하는 다음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 이미지의 출처는 모두 위키피디아.

a4qt

2015년 12월 4일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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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눔(Khnum, 나일 강의 신)과 헤케트(heqet, 출생의 여신, 개구리 형상). 왼쪽에 앉아 있는 것이 크눔(나일 강의 신), 오른쪽에 무릎을 꿇은 것이 헤케트(출생의 여신)이다.  크눔의 머리는 염소나 양이고 헤케트의 머리는 개구리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과 개구리 재앙은 크눔과 헤케트의 죽음과 징벌을 의미한다. 이집트 신화에서 크눔은 남편, 헤케트는 아내로 자주 등장한다.

모세와의 첫 만남에서 바로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애굽의 신들은 신상과 벽화에 있었다. 바로는 신상과 벽화, 신성 문자로 기록된 문서로 그가 아는 신들을 배웠다. 신상도, 벽화도 없는 신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바로의 강퍅한 마음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는 누구도 조각하지도 않고 새겨 넣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써, 강력한 역사, 행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신상도, 벽화도 필요 없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바로도, 이스라엘도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은혜는 조각과 벽화를 남기는 세공인의 열심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알려주실 때 하나님을 아는 은혜가 주어진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 출애굽기 5:2

 

“내 백성을 보내라”.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바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나는 알지 못하니,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러나 결국 바로는 이스라엘을 보냈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되었다. 돌을 깍아 만든 신상도 벽화나 그림도 없는, 그래도 볼 수도, 알지도 못했던 노예들이 믿는 다는 그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애굽은 다신교 사회였고 신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었다. 애굽의 신들은 풍요와 출생, 치료와 보호, 하늘과 태양의 신, 바로의 보호신까지 다양했다. 애굽의 신들은 국가 통치와 운영 전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정교한 의식과 축적된 지혜가 있었고 종교의식과 우상을 섬기는 신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자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신관들은 ‘신성문자’로 불리는 별도의 문자를 사용했다. 일반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는 감히 사용할 수 없는 문자였다. 이런 애굽에서 하찮은 노예들이 가진 신앙과 노예들의 신이 전한 명령을 바로가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자신도 신과 방불한 존재였고 노예들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진정으로 능력있는 신이라면 자기 백성들을 노예로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더욱 ‘여호와’라고 하는 신의 말을 듣고 노예들을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바로에게는 애굽의 신들이 참된 신들이었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헛된 것인지 깨닫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손을 통하여 애굽에 재앙이 임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떠나게 될 때 애굽 사람들도 바로도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애굽에 임한 열 개의 재앙은 애굽인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관계가 있다.

 

  1. 나일강이 피로 변하다

– 크눔 : 나일강의 수호신

– 하피 : 나일강 범람의 신

 

나일강은 애굽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나일 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의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가 애굽이다. 나일 강은 매년 같은 시기 범람하는데 그 때 마다 상류의 비옥한 흙이 떠내려와 해마다 새로운 토지가 형성된다. 안식년도 필요 없이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나일 강의 수호신은 크눔, 범람을 관장하는 신은 하피였다. 나일 강물이 피가 되었으니 그 해의 농사는 망친 것이고 당장 마실 물도 없게 되었다.

 

  1. 개구리

– 헤케트 : 개구리 형상의 여신 헤케트는 출생의 여신으로 믿어졌다.

 

– 게브 : 대지의 신. 땅의 티끌이 이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대지의 신이 열매를 맺어 풍요를 주지 않게 되었다.

 

  1. 파리(혹은 딱정벌레)

– 케프리 : 창조와 부활의 신 케프리. 케프리 신상의 머리는 풍뎅이 대가리다.

 

  1. 가축들의 죽음

– 하토르 : 하늘의 여신 하토르. 하토르 신상의 머리는 소 대가리다.

 

  1. 독종

– 이모텝 : 치료의 신

– 이시스 : 보호의 여신

치료의 신 이모텝과 보호의 여신 이시스는 독종을 치료하지 못했다.

 

  1. 우박

– 누트 : 하늘의 여신. 하늘의 여신은 더 이상 좋은 날씨를 주지 못했다.

 

  1. 메뚜기

– 네프리 : 곡식의 신. 네프리의 머리는 메뚜기 대가리다.

 

  1. 어둠

– 아문-라 : 태양의 신

‘아문-라’는 태양의 신이자 애굽 신의 우두머리다. 태양신 ‘라’와 또 다른 신 ‘아문’을 하나로 합쳐서 새로 고안한 신이 ‘아문-라’였다. 언제나 애굽을 비추던 태양의 신은 어둠에 갇혀 힘을 쓰지 못했다.

 

  1. 장자의 죽음

장자의 죽음 중에서도 바로의 장자가 죽은 것은 애굽 전체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바로의 보호신 호루스는 바로를 지키지 못했다.

 

열 개의 재앙은 애굽 신들의 무력함과 쓸 떼 없음을 보여주었다.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나일 강의 신 크눔과 하피가 죽기라도 한 듯이 강물은 피가 되었고 그 해 농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지의 신 게브와 곡식의 신 네프리가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풍요는 대지에서 나온 이와 토지를 뒤덮은 메뚜기에 의해서 사라졌다.

 

출생(헤케트)과 창조와 부활(케프리)는 개구리와 파리 떼가 되어 애굽인들을 괴롭혔고 소 대가리를 가진 신 하토르는 가축들을 살려내지 못했다. 이모텝과 이시스는 애굽 전역에 퍼진 질병으로 부터 건져낼 능력이 없었으며 하늘의 여신 누트가 통치한다고 믿었던 하늘에서는 불붙은 우박이 내렸고 태양의 신 마저 어둠에 갇혀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는 모든 장자가 죽었고 바로의 장자도 죽었다. 바로의 수호신 호루스 마저 노예들의 신 여호와를 이기지 못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 출애굽기 7:5

 

열 개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은 지금까지 숭배했던 신들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들었어도 상한 마음과 혹독한 노역으로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a4qt

2015년 12월 1일

출애굽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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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sraelites Leaving Egypt, David Roberts (1796–1864), 1829. Birmingham Museum and Art Gallery

출애굽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상은 열 개의 재앙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착하고 불쌍한 우리 이스라엘은 복의 복을 받고 천하의 나쁜 놈 바로는 벌을 받는 이야기는 출애굽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열 가지 재앙의 놀라움도 본질이 아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노예 생활의 처절함도 혹독한 재앙도 아니다. 물론 재앙들 마다 이유와 의미가 있지만 드라마틱하고 스펙타클한 재앙에만 몰두하면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출애굽기가 가진 드라마틱한 면모와 재앙의 흥미진진함에 몰입한 독자들은 6:13절에서 크게 실망하게 된다. 추리소설 첫 페이지에 사건의 결말과 범인의 이름이 써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화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6:13절은 최악의 스포일러spoiler다. 읽기도 전에 결말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을 미리 말해버림으로써 독자들이 사건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스포일러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 출애굽기 6:13

 

아직 첫 재앙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출애굽의 결말이 나와버렸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 명령이 전달되고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땅에서 나왔다. 사건은 이미 끝났다. 아예 다음 구절에는 어느 집안의 누가 애굽에서 나왔는지 족보까지 나와 있다. 이제 재앙이 일어나고 고생하던 이스라엘은 힘을 얻고 폭정을 휘두르던 애굽 왕 바로가 벌을 받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출발선에 ‘그렇게 출애굽은 끝났고 그때 나온 사람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고 써 있는 것이다.

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 출애굽기 6:14

 

누구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극적인 재미의 핵심을 풀어놓기 직전에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휘두르는 채찍 소리가 귀를 찢고 고생하는 선민들의 선혈이 낭자해서 읽는 사람의 마음이 끓어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하나님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재앙이 하나씩 일어날 때 마다 원한이 풀리고 통쾌한 마음이 드는 극적 효과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한 편의 영화를 본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기록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창세기 15:13-14

 

이스라엘 민족이 불쌍한 것도 맞고 고생하는 것도 맞지만 그보다 앞선 이유가 있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었다. 출애굽의 배경에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있다. 열 개의 재앙은 출애굽의 핵심이 아니라 과정이다. 출애굽이 가능했던 이유는 열 개의 재앙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개의 재앙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시구나. 착한 사람 복 주시고 나쁜 사람 벌을 주시는구나. 그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이렇게 벌을 주시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자. 열 개의 재앙을 보면서 내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읽지 못한 결과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다. 한 번 맺으신 약속을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신앙 생활에서 체험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애굽에 임한 열 개의 재앙에 방불한 개인적 신앙체험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영적인 체험에는 체험 자체에만 몰입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유익으로 시작한 체험이 끝내는 해로움으로 끝날 수도 있다. 출애굽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열 개의 재앙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초점을 갖도록 본문이 기록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체험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하셨고 앞으로 오셔서 더 이루실 언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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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4일

출애굽의 가장 큰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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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이루셨다. 그림은 Moses Smashing the Tablets of the Law, 램브란트. 1659년(Gemäldegalerie, Berlin).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지는 모세.

출애굽의 가장 큰 장애물은 파라오가 아니었다. 파라오의 굳은 마음도, 재앙도, 심지어 장자들의 죽음도 뜻밖의 일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미 모세를 찾으셔서 사명을 주실 때부터 드러난 일들이었다. 오히려 모세가 출애굽 역사의 시작 자체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모세는 출애굽을 이루시는 하나님 계획의 가장 큰 핵심인물이었다. 출생과 생존, 성장과정까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가 겪은 인생의 격랑들은 출애굽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그런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 출애굽기 4:1

나를 믿지 않을 겁니다. 내가 하는 말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도 믿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40년 만에 돌아온 모세의 말을 백성들이 믿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군대를 거느리고 온 것도 아니고. 무엇이든 보여줄 만한 것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가지 이적을 경험하게 하셨다.

 

땅에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고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품 안에 넣었던 손에 나병이 생기고 다시 회복되었다. 백성들이 믿지 않거든 보여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믿지 않으면 나일 강 물을 땅에 부으면 강 물이 피가 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면 모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났음을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출애굽기 4:10

 

이적을 경험했어도, 그 이적들을 백성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게 되었어도 모세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파라오를 설득하고 백성들이 자신을 믿게 하려면 뛰어난 언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사명을 주셨다면 적어도 사명을 받은 후에는 언변이라도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저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저는 여전히 말을 잘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 출애굽기 4:11-12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정도 말씀을 들으면 아무 소리 못하고,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일어날 것 같다. 적극적인 순종은 아니더라도, 부득이한 순종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네 알겠습니다’해야 할 분위기인데, 모세는 그렇지 않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 출애굽기 4:13

 

모세는 애굽으로 갈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적을 경험했어도, 하나님께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는 아닙니다. 사람을 잘 못 고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 출애굽기 4:14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노하신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에 주목하자. 분명 노하셨지만 모세에게 화를 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모세를 설득하고 계신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아론이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다 안다. 그런 아론이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모세는 계속해서 발을 빼며 거절하고 말씀을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하나님께서 화도 내보고, 달래기도 해보지만 모세의 마음은 열리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를 믿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셔야 합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안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내세우는 이유들은 나름 합리적이었고 염려도 현실적이었지만 하나님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염려했던 일들은 단 한 가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결코 안될 것 같은 일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루어졌다. 말 주변 없다는 모세의 대변인이 될 형 아론은 하나님의 산 까지 찾아와서 모세를 만났다(40년 만의 재회였다). 장인 이드로는 기꺼이 모세를 보내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장로들이 소집되어 놀라운 소식을 들었으며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믿었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벌인 실랑이를 제외하면 출애굽의 첫 과정은 순조롭게 시작됐다. 출애굽의 가장 큰 방해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모세였다.

 

때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은혜를 사모하고, 경험할수록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다시 한번 나를 측량해야 하는 이유다.


*

집으로 돌아온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에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이드로는 아무런 이견 없이 흔쾌히 허락한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같은 처지에 있었던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을 떠날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모세와 야곱은 같은 상황, 같은 처지였다.

야곱이 도망자가 되어 라반의 집에 갔듯이 모세도 도망자가 되어 이드로를 만났다. 야곱은 라반의 딸과, 모세는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했다. 두 사람 다 장인의 집에서 양을 치며 살았고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라반은 언제까지라도 야곱을 붙잡아 두려고 했고 야곱은 한마디 말도 없이 야반도주를 해야만 했다. 반면에 이드로는 애굽으로 돌아가 형제들이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는 모세의 말에 한 마디 이견도 없이 ‘평안히 가라’고 말한다.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이유를 계속해서 찾았던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는 장인의 시원한 한 마디는 더 이상 이 사명을 피할 수 없다는 일종의 쐐기가 되지 않았을까?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 출애굽기 4:18

하나님께서도 한 마디 덧붙이셨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쳤던 과거가 마음에 걸리는 모세가 하나님께 여쭙기도 전에. 이제 모세에게 더 이상 거절할 명분도, 여지도 없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 출애굽기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