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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일

출애굽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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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sraelites Leaving Egypt, David Roberts (1796–1864), 1829. Birmingham Museum and Art Gallery

출애굽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상은 열 개의 재앙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착하고 불쌍한 우리 이스라엘은 복의 복을 받고 천하의 나쁜 놈 바로는 벌을 받는 이야기는 출애굽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열 가지 재앙의 놀라움도 본질이 아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노예 생활의 처절함도 혹독한 재앙도 아니다. 물론 재앙들 마다 이유와 의미가 있지만 드라마틱하고 스펙타클한 재앙에만 몰두하면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출애굽기가 가진 드라마틱한 면모와 재앙의 흥미진진함에 몰입한 독자들은 6:13절에서 크게 실망하게 된다. 추리소설 첫 페이지에 사건의 결말과 범인의 이름이 써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화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6:13절은 최악의 스포일러spoiler다. 읽기도 전에 결말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을 미리 말해버림으로써 독자들이 사건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스포일러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 출애굽기 6:13

 

아직 첫 재앙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출애굽의 결말이 나와버렸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 명령이 전달되고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땅에서 나왔다. 사건은 이미 끝났다. 아예 다음 구절에는 어느 집안의 누가 애굽에서 나왔는지 족보까지 나와 있다. 이제 재앙이 일어나고 고생하던 이스라엘은 힘을 얻고 폭정을 휘두르던 애굽 왕 바로가 벌을 받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출발선에 ‘그렇게 출애굽은 끝났고 그때 나온 사람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고 써 있는 것이다.

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 출애굽기 6:14

 

누구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극적인 재미의 핵심을 풀어놓기 직전에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휘두르는 채찍 소리가 귀를 찢고 고생하는 선민들의 선혈이 낭자해서 읽는 사람의 마음이 끓어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하나님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재앙이 하나씩 일어날 때 마다 원한이 풀리고 통쾌한 마음이 드는 극적 효과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한 편의 영화를 본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기록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창세기 15:13-14

 

이스라엘 민족이 불쌍한 것도 맞고 고생하는 것도 맞지만 그보다 앞선 이유가 있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었다. 출애굽의 배경에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있다. 열 개의 재앙은 출애굽의 핵심이 아니라 과정이다. 출애굽이 가능했던 이유는 열 개의 재앙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개의 재앙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시구나. 착한 사람 복 주시고 나쁜 사람 벌을 주시는구나. 그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이렇게 벌을 주시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자. 열 개의 재앙을 보면서 내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읽지 못한 결과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다. 한 번 맺으신 약속을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신앙 생활에서 체험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애굽에 임한 열 개의 재앙에 방불한 개인적 신앙체험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영적인 체험에는 체험 자체에만 몰입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유익으로 시작한 체험이 끝내는 해로움으로 끝날 수도 있다. 출애굽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열 개의 재앙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초점을 갖도록 본문이 기록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체험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하셨고 앞으로 오셔서 더 이루실 언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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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4일

출애굽의 가장 큰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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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이루셨다. 그림은 Moses Smashing the Tablets of the Law, 램브란트. 1659년(Gemäldegalerie, Berlin).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지는 모세.

출애굽의 가장 큰 장애물은 파라오가 아니었다. 파라오의 굳은 마음도, 재앙도, 심지어 장자들의 죽음도 뜻밖의 일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미 모세를 찾으셔서 사명을 주실 때부터 드러난 일들이었다. 오히려 모세가 출애굽 역사의 시작 자체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모세는 출애굽을 이루시는 하나님 계획의 가장 큰 핵심인물이었다. 출생과 생존, 성장과정까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가 겪은 인생의 격랑들은 출애굽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그런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 출애굽기 4:1

나를 믿지 않을 겁니다. 내가 하는 말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도 믿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40년 만에 돌아온 모세의 말을 백성들이 믿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군대를 거느리고 온 것도 아니고. 무엇이든 보여줄 만한 것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가지 이적을 경험하게 하셨다.

 

땅에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고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품 안에 넣었던 손에 나병이 생기고 다시 회복되었다. 백성들이 믿지 않거든 보여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믿지 않으면 나일 강 물을 땅에 부으면 강 물이 피가 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면 모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났음을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출애굽기 4:10

 

이적을 경험했어도, 그 이적들을 백성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게 되었어도 모세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파라오를 설득하고 백성들이 자신을 믿게 하려면 뛰어난 언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사명을 주셨다면 적어도 사명을 받은 후에는 언변이라도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저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저는 여전히 말을 잘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 출애굽기 4:11-12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정도 말씀을 들으면 아무 소리 못하고,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일어날 것 같다. 적극적인 순종은 아니더라도, 부득이한 순종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네 알겠습니다’해야 할 분위기인데, 모세는 그렇지 않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 출애굽기 4:13

 

모세는 애굽으로 갈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적을 경험했어도, 하나님께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는 아닙니다. 사람을 잘 못 고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 출애굽기 4:14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노하신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에 주목하자. 분명 노하셨지만 모세에게 화를 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모세를 설득하고 계신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아론이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다 안다. 그런 아론이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모세는 계속해서 발을 빼며 거절하고 말씀을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하나님께서 화도 내보고, 달래기도 해보지만 모세의 마음은 열리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를 믿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셔야 합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안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내세우는 이유들은 나름 합리적이었고 염려도 현실적이었지만 하나님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염려했던 일들은 단 한 가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결코 안될 것 같은 일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루어졌다. 말 주변 없다는 모세의 대변인이 될 형 아론은 하나님의 산 까지 찾아와서 모세를 만났다(40년 만의 재회였다). 장인 이드로는 기꺼이 모세를 보내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장로들이 소집되어 놀라운 소식을 들었으며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믿었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벌인 실랑이를 제외하면 출애굽의 첫 과정은 순조롭게 시작됐다. 출애굽의 가장 큰 방해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모세였다.

 

때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은혜를 사모하고, 경험할수록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다시 한번 나를 측량해야 하는 이유다.


*

집으로 돌아온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에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이드로는 아무런 이견 없이 흔쾌히 허락한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같은 처지에 있었던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을 떠날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모세와 야곱은 같은 상황, 같은 처지였다.

야곱이 도망자가 되어 라반의 집에 갔듯이 모세도 도망자가 되어 이드로를 만났다. 야곱은 라반의 딸과, 모세는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했다. 두 사람 다 장인의 집에서 양을 치며 살았고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라반은 언제까지라도 야곱을 붙잡아 두려고 했고 야곱은 한마디 말도 없이 야반도주를 해야만 했다. 반면에 이드로는 애굽으로 돌아가 형제들이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는 모세의 말에 한 마디 이견도 없이 ‘평안히 가라’고 말한다.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이유를 계속해서 찾았던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는 장인의 시원한 한 마디는 더 이상 이 사명을 피할 수 없다는 일종의 쐐기가 되지 않았을까?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 출애굽기 4:18

하나님께서도 한 마디 덧붙이셨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쳤던 과거가 마음에 걸리는 모세가 하나님께 여쭙기도 전에. 이제 모세에게 더 이상 거절할 명분도, 여지도 없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 출애굽기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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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1일

믿음이 요구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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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아랍어로는 Jabal Mūsá , 이집트어로는 Gabal Mūsa. 뜻은 ‘모세의 산’이다.

이것이 증거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주어진 사람에게 믿음이 요구되었다. 모세가 그랬다.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만한 충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명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세에게는 믿음이 요구되었고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는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에는 우리에게 낯설은 측면이 여전히 존재한다. 믿음을 원하는 조건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낯설음이 더 심할 것이다. 믿음이 있어서 사명을 주신 것도,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신 것도 아니었다.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이 진정으로 믿음이 요구되는 때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상식적으로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모세를 향한 기대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도, 애굽 권력의 핵심에 접근했을 때도 아니었다. 동포를 향한 마음이 끓어오르는 순간도 아니었다. 누구도 모세를 기억하지 않을 때에, 모세 자신은 애굽 언어 조차 잊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명했다. 거기에는 오해나 착각이 일어날 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노예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 출애굽기 3:8

 

이해 못할 부분이 없었다. ‘내가 내려가서… 데려가려 하노라’는 말씀이었다. 아, 이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건져내시는구나, 잊고 계시지 않았구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모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뒤에 이어졌다. 출애굽의 사명이 모세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출애굽기 3:10

 

이것은 갑작스러운 부르심이었다. 모세는 자신을 향한 동족들의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 애굽의 통치자가 되기 보다는 동족들과 한 배를 타는 것을 택하기도 했었다. 한 때는 고통 받는 동포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사는 삶에 잘 적응했다. 모세는 애굽으로의 복귀전을 꿈꾸지 않았다. 권토중래? 와신상담? 모세의 인생에 이런 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가살이를 하는 양치기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이제 가라’,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애굽의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그만 부려먹고 가나안으로 보내라고 선언하고 백성들을 인도하여 낼 사명이 주어졌다. 뭔가 잘못됐다. 이건 아니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 출애굽기 3:11

 

 

모세의 대답은 “내가 누구이기에(Who am I)”였다. 모세가 생각할 때 자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파라오를 만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설득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 출애굽기 3:12

 

‘내가 누구이기에(Who am I)’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 모세에게 주신 대답은 ‘너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가 파라오를 만나러 갈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낼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약속에는 증거가 필요하다. 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이 계약을 맺을 때에도 양피지를 쓰지 못하면 흙판을 만들어서라도 도장을 찍었다. 중요한 언약이 맺어질 때에는 짐승을 죽여 증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시하신 증거는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것’은 아직 눈 앞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제부터 일어날 일이었다. 정작 모세는 파라오를 만나지도 않았다. ‘이것이 증거다’라고 말하려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손으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보고 믿을 수 있다. 증거로써 효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증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고 그 증거를 따르려면 믿음이 필요했다.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받은 것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면서 장차 이루실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믿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믿음이 있어서, 믿음을 조건으로 사명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믿음이 요구되는 때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모세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순간은 수배자가 되어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아갈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는 그 순간이 오히려 믿음이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순간이 가장 믿음이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증거라고 말씀하실 때 믿음이 필요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지금은 바라는 일이며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분명한 실상과 증거로 확정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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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모세가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

Hatshepsut

하셉수트/Hatshepsut(1508–1458 BC, 이집트 18왕조).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진 파라오의 딸이다. 파라오가 되어 여왕으로서 애굽을 통치했다. Metropolitan Museum of Art. NY. USA.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다시 기회가 있을까?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살인자가 된 모세가 광야로 숨어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남은 것은 절대적 낙심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모세는 노예생활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어 애굽 왕족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세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생존과 입양, 성장 과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였다. 그만큼 모세의 잠적이 가져온 낙심도 컸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더욱 생육하고 번성했고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인구가 늘어나면 반란의 위험도 증가하기 때문에 지배자의 잔혹함도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때 모세가 태어났다. 삼 개월 까지는 아이를 감출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아이는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띄워졌다. 갈대 상자는 파라오의 딸에 의해 발견되었고 공주는 이 아이가 노예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양자로 입양했다. 아이는 갈대 상자를 끝까지 따라온 누이의 재치로 자기 어머니를 유모로 삼아 생모의 젖을 먹으며 자랐고 이름은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의 ‘모세’로 붙여졌다.

 

생후 삼 개월 된 아기가 갈대 상자에 담겨 버려지고 공주의 양아들이 되는 것은 기적이다. 이 과정을 지켜본 모세의 누이와 어머니는 물론이고 사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망을 품고 장래의 일을 기대할 만 했다. 모세가 자랄수록 언젠가 모세가 권력을 갖게 되면 노예 생활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한 순간에 사라진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 출애굽기 2:11-12

 

모세는 동족 히브리 노예를 관리하는 애굽 하급관리 한 사람을 죽였다. 고의적인, 계획된 살인이었다. 좌우를 살폈지만 목격자가 있었다. 살인이 발각된 모세는 하루 아침에 신분을 잃고 사막으로 숨는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려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 출애굽기 2:15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급 관리 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왕가의 일원 – 아무리 입양되었다고 해도 – 인 모세가 하루 아침에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사막으로 숨어들만한 일로 확대되었을까? 왕위계승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를 양자로 삼은 바로의 딸은 훗날 애굽의 여왕이 되었다. 여왕에게는 친 자식이 없었고 죽은 남편은 후궁에게서 아들을 한 명 낳았다. 후궁에게 태어난 아들과 여왕이 입양한 아들 모세. 두 사람이 다음 파라오가 될 후계자들이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 히브리서 11:24-25

그러나 모세는 파라오가 되기를 거절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모세가 왕위를 거절하자 여왕의 죽은 남편이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 파라오가 되었고 지금 그가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모세는 애굽의 파라오가 될 기회를 버릴 만큼 피 한 방울, 뼈 한 조각 까지도 철저한 히브리인이었고 언제 노예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매우 강한 민족의 지도자로 소망의 정점에 있었다. 모세는 제거되어야 했다. 이보다 더 좋은 빌미는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확신 그 자체였다. 그의 출생과 생존, 입양과 성장 자체가 기적의 연속이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런 모세가 하루아침에 광야에 숨어든 수배자가 되어 양을 치며 살게 되었다.

모세가 그토록 허무하게 애굽에서 살라졌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느꼈을 좌절은 우리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것이다. 모세가 사라진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망이 간절할수록, 소망이 생긴 과정이 극적일수록 소망이 사라진 자리에 낙심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숨어드는 것으로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왕가에 입양된 모세가 파라오가 되어 노예를 해방시키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출애굽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발걸음은 그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었고 이미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또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 출애굽기 2:24-25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기억하셨다.

이것이 모세가 사라졌을 때,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은 이스라엘이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이었다.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그곳에서 40년을 숨어 살았다. 누구도 더는 모세를 추억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을 때.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또 기억하고 계셨다. 모든 소망의 재료가 사라지고 희망이 움틀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때에 우리는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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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6일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Hatshepsut's mortuary temple complex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이집트 역사에서 New Kingdom (1549–1069 BC)에 해당한다. 사진은 신왕조의 여왕 하셉수트의 무덤이다. 전통적인 견해에서 하셉수트는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진 파라오의 딸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이루어진다. 짧고 유한한 생을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규모를 감히 짐작할 수도, 감지할 수도 없다.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넓이와 깊이를 일부라도 옅본 사람은 자신의 생애 중에 응답을 얻지 못해도 충분한 만족과 감사를 누리게 된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출애굽기 1장은 극렬한 고난 속에서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 출애굽기 1:7

 

이스라엘 자손, 곧 야곱의 자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했다. 아담과 하와에게, 노아에게 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난민이었다. 칠 년 기근을 피해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을 찾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보내신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었고 애굽으로 순조롭게 이주할 수 있었다. 애굽에서 특별한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고센 땅을 얻어 목축에 종사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했고 매우 강해졌다. 이대로 번성해서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민족 전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 출애굽기 1:8

 

애굽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진 것이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옛 왕조의 지배층이 노예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가 된 것은 단지 이전 왕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우상숭배 시스템에 동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굽에 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며 새로운 왕조가 등장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파라오(바로)를 정점으로 한 신정체제다. 새로 세워진 왕조들은 기존의 종교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는데 피지배층의 불만을 잠재우고 제국을 통치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왕조가 대규모 종교행사나 신전을 세우는 건설사업을 벌이는 이유도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굽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으니 파라오에 대한 숭배도, 파라오를 신처럼 여기지도 않았다. 국가적인 규모의 종교 행사를 열고 축제를 벌이면 애굽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파라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거다. 게다가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으니 아직 안정적인 통치체계를 세우지 못한 새 왕조에게 이스라엘이 곱게 보일리가 없다. 새로운 왕조의 두려움이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 출애굽기 1:10

 

고센 지역에서 목축을 하며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대규모 건축사업에 동원된 노예가 되었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여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출산을 돕는 산파들은 태어난 아이가 사내이면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파라오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경외했다. 산파들을 믿을 수 없게 된 파라오는 모든 애굽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에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물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큰 저항을 만났고 이 상태가 계속되면 이스라엘 민족은 다음 세대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왕의 명령을 어긴 산파들은 처벌을 받거나 망하지 않고 오히려 집안이 흥왕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 출애굽기 1:20

 

역경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이 은혜는 과거에 계획하시고 말씀하신 언약을 이루시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창세기 15:13-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다. 아직 아들 이삭은 물론이고 여종 하갈에게 낳은 이스마엘도 태어나기 전에 하신 말씀이었다. 자식이 없어 종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장래에 일어날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 애굽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이 번성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나라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징벌과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는 출애굽이 일어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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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5일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 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저항에 부딪힌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했을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정도다.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가 아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안 이루어지는 대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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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6일

불안이 만든 건축물, 바벨탑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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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er of Babel, by Lucas van Valckenborch, 1594, 루브르 박물관 소장.

불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불안에 휩쌓인다. 믿음이 없어서 시작된 불안은 믿음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없앨 수 없다. 우리에게는 믿음 이외의 방법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방법으로 불안을 없애려는 죄에서 비롯된 습성이 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 없이 불안을 없애려 했던 시도였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자손들은 다시 번성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는데 시날 평지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시날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시날Shinar’의 뜻은 ‘두 개의 강 사이’로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뜻이다. 터키 동부의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한 두 개의 강이 나란히 흐르며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수메르, 아카드, 고바빌론, 신바빌론,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가 일어났다. 시날 땅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바벨탑을 만든 사람들이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창세기 11:4

 

탑을 쌓은 동기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름을 내는 것’은 단순한 유명함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삶을 의미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이어졌다. 이런 시도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흩어진 도시마다 거대한 탑이 세워졌고 탑에는 우주 혹은 신과의 연결을 의미하는 이름들이 붙어졌으며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신을 섬기는 제단이 설치되고 사제가 머물렀다. 도시는 우상을 숭배하는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신전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에 남아 있는 지구라트이다.

 

흩어짐을 면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은 흩어져야 했다.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온전하게 다스려야 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8,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창세기 9:1,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원했고 탑 자체에 종교적인 기능을 부여해 하나님을 대체하려 했으며 흩어지지 않고 탑이 보이는 주변에서만 살기를 작정했다. 불안함 때문이었다. 다시 홍수가 일어나 모두가 죽게 될까 하는 그 불안함 말이다.

 

사람들은 진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었고 역청을 이용해서 벽돌을 접착했다. 역청은 개발되지 않은 노천유전에서 구할 수 있는 천연 방수제로 모세를 담아 나일 강물에 띄운 바구니에도 칠해졌다. 탑의 하층부를 역청으로 칠하면 두 강 중 어느 쪽이 범람하더라도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역청이 칠해진 성과 높은 탑은 홍수를 피할 수 있는 대피소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 그리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주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홍수 심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두 개의 큰 강 사이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물리쳐야 했지만 스스로 역청을 칠한 탑을 쌓고 거기 머물러 살면서 혹시 모를 강의 범람에 대한 불안을 떨치려 했다.

 

성읍과 탑 건설은 성공적이었다. 온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을 흩어시기 전 까지 탑은 거침없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약속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무지개 언약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탑을 쌓고 스스로 이름을 내야 했다.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언약을 주신 분의 이름을 드러낸다. 그들은 흩어져도 멸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흩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박해를 받아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일어난 복음의 확산을 생각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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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에서 발굴된 주거지 유적. 저 멀리 한 층만 남은 지구라트가 보인다(전체 7층 중에 1층만 남았다). 주거지 유적에도 검은색 역청이 칠해진 흔적이 보인다.

 

 

 

*

바벨탑 사건이 창세기 10장 뒤에 있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10장 이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에는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 않고 주제별로 기록된 부분이 있다. 바벨탑 사건도 그렇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10장의 족보의 맨 마지막 사람이 살던 시대에 일어나지 않았다.

바벨탑 사건의 전제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인 것인데 이미 창세기 10장의 족보에서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흩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가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시대 범위 안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

바벨탑 이후에도 사람들은 탑 쌓기를 계속했다. 현재도 존재하는 지구라트(ziggurat)들은 진흙벽돌을 재료로 역청을 발라 건축했다. 보통 7층에서 8층으로 지어지는데 가장 높은 층에는 바빌론의 신(주로 말둑)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어떤 지구라트는 매 층마다 다른 신을 섬기도록 되어 있었다.

 

*

현재까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지구라트는 없다. 성경시대에 지어진 지구라트 중 가장 높은 것은 느부갓네살이 지은 것이다.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은 고바빌론 왕국이 남긴 에테메난키(Etemenanki)탑 유적을 고쳐 새로운 탑을 쌓았는데 높이가 90미터가 넘었다(아파트 30층 높이). 에테메난키의 뜻은 ‘하늘과 땅의 기초’다.

학자들은 느부갓네살이 새로운 탑의 기초로 사용한 고바빌론 왕국의 에테메난키 유적을 바벨탑의 흔적으로 여긴다(물론 확인할 수는 없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가장 크고 높은 탑이 에테메난키 일 뿐이다). 에테메난키 외벽 한 변의 길이는 약 400미터였고 가장 높은 곳에 바빌론의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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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일

족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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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persion of the descendants of Shem, Ham, and Japheth (map from the 1854 Historical Textbook and Atlas of Biblical Geography)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 창세기10:32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세계 지도이자 최고의 가이드 북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끝내고 광야로 나왔다. 광야는 위험한 곳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특별한 돌봄이 있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가면 되었다. 넉넉한 재산도 있었고 가축들도 있었다. 그러나 의식주와 안전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돌봄의 전부는 아니었다. 노예생활을 하느라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지식이 함께 주어졌다. 그 지식의 결정체가 창세기 10장의 족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이드북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계, 인명, 지명, 주요 도시와 그 기원을 알게 되었다. 세계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광야에서 처음 모세오경을 읽는 출애굽 백성들이 받았을 지적인 충격을 생각해보라. 노예생활을 하며 배우지 못했고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세계와 열방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처음 대하는 이스라엘을.

 

이 족보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된 민족과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기록된 인물이 세계 역사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지명이 바뀌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도 있지만 오늘날에도 분명하게 확인되는 인물과 지명들이 많이 있다.

 

야벳의 후손인 야완은 그리스의 옛 지명인 이오니아이고 함의 아들인 구스는 이디오피아, 미스라임은 이집트의 옛 명칭이다. 미스라임은 ‘두 개의 애굽’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함의 후손 중 니므롯은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1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그가 세운 도시 에렉은 고대도시 우룩의 히브리식 명칭이다. 앗수르와 니느웨는 구약 성경에 계속해서 등장하며 출토된 유물은 유럽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부스 족속은 다윗이 정복하기 전까지 예루살렘에 살던 족속이다. 가나안의 경계로 소개된 소돔과 고모라, 계속 해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했던 블레셋, 출애굽 때 이스라엘과 싸우는 아모리 족속, 메소포타미아 동쪽의 엘람, 솔로몬이 금을 가져오던 오빌 까지. 창세기 10장은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계지리 정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원, 주요 도시를 상세히 알려준다.

 

세계지리, 인명, 지명에 관한 정보는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층만이 소유하고 은밀하게 후대에 계승되는 고급정보다. 노예였을 때는 이런 정보가 주어지지도, 필요도 없었다. 묵묵히 별돌을 만들거나 전쟁에 동원되어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채 싸우다 죽으면 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애굽을 떠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손에 쥐어 주셨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족보는 출애굽 1세대들에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들, 언어에 따른 나라와 민족의 분포. 그들의 조상에 관한 내용까지 상세히 알게 되었다.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정치적 지형만이 아니었다.

넓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과 같이 조상 노아의 자손들이며 어떤 사건과 경위를 통해서 흩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 조상의 후손들이며 그 조상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했음도 알게 되었다.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출애굽 1세대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써의 세계관을 갖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족보는 재미가 없다. 족보의 인물들이 나와 관계가 있음을 깨달을 때 족보가 의미있게 보이고 감사의 이유가 되는데 창세기 10장의 족보와 우리의 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와 성경의 족보가 연결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임을 밝히는 로마서의 가르침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다. 그렇다고해서 창세기10장의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축소되지는 않는다. 노예생활을 마치고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쥐어주신 가이드북은 최고의 정보를 담고 있었다. 우리의 여정이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가이드를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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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0일

노아 4 / 술취한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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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unkennes of Noah, Giovanni Bellini(1430–1516), Musée des Beaux-Arts de Besançon, France.

홍수가 끝났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기 시작했다. 삶은 계속 되었다. 세상은 홍수로 깨끗해지고 새로워졌지만 사람들의 삶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노아는 홍수 전에 하던대로 다시 농부가 되었다. 방주에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기 전에 파종을 하고 추수를 해야했다. 노아는 포도나무도 심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벗거벗은지라 / 창세기 9:20-21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마실 음료를 확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수가 일어난 지역에서는 사방에 물이 넘치지만 정작 마실 물은 찾기 힘들다. 마실 물이 귀한 곳에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음료로 사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문제는 노아가 취해버린 것이다. 술에 취한 노아가 자신의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을 때 아들 함이 들어왔다. 아버지의 나체를 본 함은 장막 밖으로 나가 다른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부적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 창세기 9:22

 

아비의 벌거벗은 모습은 자식이 감히 보아서는 안될 것이었고 덮어 주어야 하는 허물이었다.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아버지 노아에게 아들 함이 준 것은 이해와 존중에서 비롯된 덮어줌이 아니라 수치와 불명예였다. 게다가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만 목격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수치를 공개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수치를 가려주었으며 감히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술에서 깨어 사건의 전말을 들은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는 저주를 선언한다.

이 사건으로 함의 아들 가나안은 다른 형제들의 종도 아닌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혹독한 저주를 받았고 이 저주는 실제로 성취되었다.

 

본문을 대하며 흔히 받는 질문은 가나안이 종이 된 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이냐는 것이다. 애초에 술에 취해 수치를 드러낸 노아의 잘못이 크냐, 아버지의 수치를 감추어주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까지 전달한 함의 잘못이 크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집중해야 할 것은 누구의 잘못이냐가 아니라 홍수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이 아닐까?

 

노아의 술취함까지 덮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식들의 존중을 받을만큼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노아가 술에 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노아의 술취함을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할 만한 의로움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노아가 겪었을 극심한 내적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아는 생존자다.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고 가족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모두가 죽었다. 노아가 아는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노아에게는 앞으로의 일을 논의할 어른도,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혼자 살아남았음을 즐거워하며 취했을 것 같지는 않다. 노아가 겪은 내적인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이 사건은 노아 개인의 술취함과 노아 가정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홍수 심판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세상과 사람을 다시 창조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죄를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한 세대도 지나지 못해 가정 안에서 자식이 저주를 받고 이후의 운명이 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신 직후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있었듯이,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신 노아의 때에도 범죄가 일어났다. 홍수에도 씻겨지지 않은 죄의 영향력은 당대에 즉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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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9일

노아 3 / 방주 생활, 홍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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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h’s Ark, oil on canvas painting by Edward Hicks, 1846 Philadelphia Museum of Art

방주에는 1등실이 없듯이

방주는 지중해 크루즈가 아니다.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지어진 방주 안에 암수 일곱 혹은 두 쌍씩 짐승들이 실려 있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곰들은 겨울이 아닌데도 잠을 자고 사자들이 금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요동치는 방주 안에 짐승들은 이리 저리 밀려 다니며 괴성을 질렀을 것이고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흔히 교회를 방주에 비유하는데 이런 면도 꼭 참고하기 바란다. 방주 안이 쾌적하지 않았듯이 교회 안도 그다지 쾌적하지는 않다. 당신을 불쾌하게 하고 소화 불량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곰과 사자가 잠들지 않고 식욕에 충실했듯이 그들도 나름대로 역할을 착실하게 감당했을 것이다. 당신이 싫어하는, 혹은 불편해하는 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거나 대표기도를 하고, 혹은 설교자가 되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기억해라. 살 수 있는 곳은 방주 안 밖에 없듯이, 교회 역시 그렇다는 것을. 방주 안에 1등실이 없듯이 교회도 그렇다.

 

 

홍수 이후 달라진 것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는 가인의 후손들만이 가축을 길렀다.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의 아들 아다가 처음으로 장막에 살면서 가축을 치기 시작했다. 가축들이 애완용일리는 없고 단지 털이나 젖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므로 가인의 후손들은 이미 육식을 했을 것이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 창세기 4:20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여전히 고기를 먹지 않았고 노아도 이제까지 짐승을 죽여 고기를 먹어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짐승을 죽이는 것은 그 짐승을 지으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홍수 이후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하나 있었다. 짐승을 피째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 창세기 9:4-5

 

짐승을 죽여 먹을 수는 있으되 피를 먹지 말아야 했다. 피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는 짐승을 잡아 피째 먹음으로써 짐승이 가진 힘 또는 영혼까지 소유하려는 의식이 있었고 심지어 사람을 죽여 인육과 피를 먹음으로써 그 사람의 힘과 영혼,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행위는 우상종교나 주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주의 깊에 보아야 할 부분은 피째 먹지 말라 하시며 피흘림의 대상을 짐승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범죄 이후 인간이 갖게 된 잔혹함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홍수 이후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육식이 허락되었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증거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죄로 인한 심판이 있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하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홍수로 온 지면을 씻어내고 이전 세대의 죄를 씻어낼 수는 있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 자체, 죄성은 씻어지지 않았다.

 

죄는 여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새로운 인류의 대표이자 조상으로 동일한 말씀을 들었다. 복을 주시며 이르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창세기 9:1